[진료실 풍경] 모두가 나의 스승

입력 2023-04-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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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연세대학교 명지병원 외래교수

처음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중학생 시절, ‘마음의 병으로 생지옥 같은 고민을 겪는 환자들에게 광명을 주어야지’ 하는 하룻강아지 같은 객기(?)가 있었다. 돌아보니, 그들은 병자요 나는 치료자라는 순전한 이원론적 세계관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막상 정신과 의사가 되어 진료를 시작하자, 점차 그들과 내가 별 차이가 없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바뀌어 갔다. ‘일부 유전 질환을 제외하고는 질병과 정상이라는 상태는 연속선상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 불안장애, 강박장애 등이 그러하다. 돌이켜 보면 나도 대학 새내기 시절 실연을 당한 후 우울증에 심하게 빠져 폐인(?)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나와 진료실에 찾아오는 수많은 청춘들과 어떠한 차이도 찾기 어려운 듯하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 점점 내원하는 환자분들에게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이는 상대의 단점에서 ‘반면교사’를 삼아 교훈을 삼는다는 진부한 내용을 말함이 아니다. 순전하게 그들에게서 인생의 ‘등불’을 발견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외래에 내원하였다. 자신의 얼굴 사진과 타인의 나체를 합성한 사진이 SNS에 배포되었는데, 경찰 수사결과 2학년 때 자신에게 구애를 했다 거절당한 남학생이 저지른 일로 밝혀졌다고 한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그녀는 그 행위에 대해 분노로 몸서리를 쳤다.

내원한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였다. “그 녀석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말 들어가 보고 싶어요. 정말로요.”

그녀의 상처에 어느 정도 공감과 지지를 해주어 왔었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역할극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순간 떠올랐다. 즉흥적으로 사이코드라마를 제의했고, 내가 그녀, 그녀가 가해자 역을 하였다.

“네가 나를 거절한 후, 사랑했던 만큼 분노와 복수심이 들었어. 그래서, 그만 그랬던 것 같아.”

그녀는 그의 영혼에 빙의된 듯 노여운 얼굴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역할극이 끝난 후, “이제야 알았어요. 사랑이 좌절되면, 사랑한 만큼 미움이 생기고… 또 그게 남자들인가 봐요.” 마치 타인의 일에 대해 바라보듯, 분노도 슬픔도 없는 듯한, 차분하고 투명한 눈길을 던지면서 그녀는 진료실을 떠났다. 원숙한 누님 같은 눈빛이었다.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공자

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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