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승자없는 선거…가장 큰 패자는 미국

입력 2016-10-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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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동 재미 언론인

미국 대통령 선거가 전에 없이 추하고 저질로 치닫고 있습니다. 추락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치유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개탄의 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선거 풍토가 야비해지고 질이 떨어진 것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부도덕하고 비정상적인 후보의 출현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권력의 양지에서 스캔들과 부패를 만들어온 클린턴이란 이름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트럼프의 도를 넘는 막말과 상식을 뒤엎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으로 갔던 선거전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습니다. 트럼프의 배가 기울고 힐러리 클린턴 쪽으로 승리가 굳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를 기울게 한 것은 음담패설이었습니다. 12년 전 ‘할리우드 엑세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연예방송인 빌리 부시와 버스 속에서 주고받은 농담이 녹음된 것을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하면서 선거판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여자들과 키스를 하고 은밀한 부분을 더듬는 농담을 하면서 “당신이 스타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버스 속의 음담패설이 거대한 태풍이 되어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삼켜버리는 순간,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오던 트럼프와 공화당과의 관계가 거대한 파열음을 일으키면서 폭발했습니다. 존 맥케인, 제이슨 샤페즈 상원의원 등 수십 명이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하고 마크 커크, 마이크 리 상원의원 등 수십 명이 트럼프의 후보직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지금까지 트럼프와 불편하면서도 공존해오던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더는 트럼프를 변호하지 않고 동료 하원의원들 당선에 몰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트럼프는 “족쇄를 풀어줘서 좋다”면서 어떻게 이기는지,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트위터를 올리며 라이언 의장을 정면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공화당의 내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음담패설 녹음이 선거운동에 지진을 일으킨 직후 트럼프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여성이 속출하고 미디어가 이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들 여성이 열 명에 이르고 TV는 트럼프의 황색 드라마로 넘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이러한 주장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며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의 음모라고 몰아붙였습니다. 힐러리가 민주당과 함께 공화당 기성정치인, 그리고 미디어가 한통속이 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모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번 선거는 모든 주류 언론이 총동원되어 트럼프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 언론인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NBC, CNN이 앞장서서 전체 미디어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은 트럼프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여성들의 주장을 과대 보도하면서도 위키리크스를 통해 연일 폭로되는 민주당 이메일에 관한 내용은 묵살하거나 축소 보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의 이러한 이중 잣대와 트럼프 낙선운동이 트럼프의 미디어 음모론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미디어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습니다. NYT나 WP 등 미국의 주류 언론은 트럼프라는 괴물 대통령 후보를 저지하기 위해 언론의 품격을 타협했습니다.

미국의 TV가 신물이 나도록 트럼프의 음담패설 녹음을 방송하고, 트럼프의 성추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모든 미디어와 엘리트 논객들이 트럼프를 쓰레기로 만드는 것이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트럼프에게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당신들은 깨끗한가?”, “왜 클린턴 성추문은 침묵하는가?” 등의 심리적 반발 말입니다.

트럼프라는 광대 후보의 음담패설이 미디어를 흥분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미국 기득권층의 실상이기도 하고 미국 대중의식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거짓말 문화는 제도화하고, 성문화는 갈수록 타락하고 있습니다. 신사도 품위문화로 포장된 위선문화와 은폐된 야생적 성문화가 트럼프를 통해 노출된 것이기도 합니다. 주류 언론은 지금까지의 절제를 허물고 트럼프의 덫에 걸려 미국 성문화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습니다.

트럼프의 음담패설 스캔들이 터진 직후 NBC-월스트리트저널 여론조사에서 힐러리가 11%포인트를 앞섰으나 일주일 뒤 발표된 ABC-워싱턴포스트 여론조사에서는 힐러리가 4%포인트 앞서고 있습니다. 민심이 변했다가 다시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여론조사기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미국 선거를 결정하는 대의원 숫자에서도 힐러리가 트럼프를 압도하고 그동안 트럼프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스윙 스테이트(경합주)인 오하이오 주, 플로리다 주에서도 트럼프가 5%포인트 앞서가던 것이 오차 범위 내에서 혼전하고 있습니다. 미국 선거는 후보자의 득표 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대의원 538명 가운데 누가 270표를 확보하느냐로 결정됩니다.

여론조사로 보면 힐러리의 당선이 거의 확실한데도 조사기관이 신중을 기하고 힐러리 진영이 안심하지 못하는 것은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현상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미국의 민심이 영국의 브렉시트 민심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맥상통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좌절감과 절박감이 트럼프 현상의 바닥에 있는 분노입니다.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나 중산층에서 저소득층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를 엘리트와 기득권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트나 미디어가 트럼프 지지자들을 ‘못 배운 사람들’ ‘못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데 묶어 지칭하고 있지만 이런 오만은 엘리트와 기득권에 대한 이들의 적대감을 크게 해주는 것입니다. 힐러리의 가장 큰 말실수는 이들의 절반을 “개탄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들의 숫자가 35% 정도입니다. 이들이 트럼프의 확고한 지지 세력이고 트럼프가 성추문으로 미디어의 공격을 받을 수록 결집력이 단단해지고 트럼프에 대한 열광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들 35%가 트럼프를 공화당 후보로 만들었지만, 대통령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한 숫자입니다. 숫자로 보면 선거는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바닥의 민심입니다. 여론조사에 나타난 민심이 아니라 침묵하는 백인들, 의중을 말하지 않는 교육받은 숨은 백인들, 힐러리가 너무 싫은 사람들, 지금까지 정치를 외면하고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진심을 말하지 않고 투표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젊은 층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힐러리를 찍지 않고 제3당으로 가거나 투표장으로 가지 않을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이 대세를 바꿀 수 있습니다.

멕시칸이 밀려오고, 무슬림 테러가 늘어나고, 청교도 건국정신이 도전받고, 법과 질서가 흔들리고, 일자리가 없는데도 일자리는 계속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실에 좌절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대변하기에 트럼프는 적합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고 그런 품성과 자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트럼프가 이들의 대변자가 된 것은 이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트럼프의 미친 사람 같은 언행에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기성 정치판을 뒤엎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으로는 가능치 않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과 미디어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이지만, 엘리트와 기성 정치 세력이 현실정치의 질서와 풍토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도 아니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결도 아닙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엘리트와 비엘리트, 미국 문화가 지나치게 허용주의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람들과 더 많은 자유와 허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결입니다.

많은 논객은 트럼프가 지면 정치적, 경제적으로 도태되는 패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엘리트들의 단순 논리입니다. 트럼프가 아니라 엘리트 자신들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선거판을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나중에 심각한 선거 후유증이 미국을 흔들 것입니다. 트럼프는 이미 기성 정치권과 언론의 합작으로 선거 시스템이 부정과 음모로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의 패자는 트럼프가 아니라 엘리트와 미디어, 공화당입니다. 가장 큰 패자는 미국입니다. 만신창이가 된 당선자는 자신과 미국의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승자 없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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