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낮술을 마시면서

입력 2016-03-2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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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대낮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낮술의 동기는 실의나 분노인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중독성 습관이거나 일종의 오락이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의 종사자일수록 낮술을 더 마시는 것 같다.” 이 네 문장은 내가 12년 전에 쓴 글의 서두이다. 생각이 발전한 게 없어 새 말을 보태지 못하고 ‘자기 표절’을 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는 ‘낮술은’에서 “낮술은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술이 센가 본다. 그러나 낮술은 강력하다. “낮술을 마시면 애미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지만, 낮술은 주기가 빨리 오르고 취기가 강렬하다. 알 수 없는 호기도 생긴다.

낮술은 쉽게 분해되지 않고 코끝에 걸린다. 정현종의 시 ‘낮술’은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라고 끝난다.

김상배의 ‘낮술’은 “이러면 안 되는데”, 겨우 일곱 자로 돼 있다. 내가 아는 가장 짧은 시다. 그렇다. 낮술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마시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취한다. 원래 낮은 일하는 시간이기 때문일까. 낮술에 취하면 민망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낮술을 마시면 알 수 없는 감각이 계발된다. 평소 생각하지 못한 말이 떠오른다. 김영승의 ‘반성·16’이라는 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술에 취하여/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술이 깨니까/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고 씌어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나는 시인이 아니지만 낮술을 마시고 뭔가 끼적거린 경우가 많다. 급하게 휘갈겨 써서 글씨를 알아볼 수 없거나 알아보더라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게 많다. “방귀의 방향”, 이게 무슨 말이지? 方向인가 芳香인가? ‘자신과 겨루고 남들과 나눈다’, 이 거룩한 말씀은 내 생각인가, 남의 말인가? “남이 깨면 프라이, 내가 깨면 병아리”, 이 해괴한 문자는 내 발상인가 어디서 베껴온 건가?

봄이 되면 낮술 마시기가 더 그럴듯해진다. “볕이 점점 좋아진다. 낮술이 당기는 계절. 햇살을 만끽하며 낮술 하기 좋은 곳…” 이렇게 글을 쓴 사람도 있다. “당신의 낮술을 책임질 새로운 멕시칸 레스토랑”, 이런 광고도 보았다.

회사 근처에 ‘낮술 환영’이라고 써놓은 치킨집이 있다. 그 밑에는 “낮부터 술을 하시면 경제 발전과 집에 일찍 들어가는 두 가지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써놓았다. 그런가? 경제 발전은 그렇다 치고, 집에 일찍 들어가게 되던가? 오히려 거의 밤까지 술을 내처 마셔 귀가가 더 늦어지곤 하던데.

낮술을 하면서 최근 세상을 버린 선배를 생각한다. 낮술을 즐기던 그는 나하고도 더러 마셨지만, 나 말고 지금부터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배와 대낮에 2~3차를 가곤 했었다. 지난해 12월에 숨진 다른 선배의 추도사를 쓰기도 했는데, 글을 쓴 회보가 발행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숨진 이가 숨진 이를 추도한 셈이 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낮술을 다시 마신다. 뭔가 새로운 말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면서. 그도 지금 하늘에서 낮술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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