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빚이 가장 많은 사람이 “걱정 마세요, 충분히 갚을 능력 있어요”라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미국 연방정부 이야기다.
월가에서는 지난 9월말로 2015 회계연도가 끝난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 및 채무 관리 점수를 ‘B’학점 이상으로 평가해 관심을 끌고 있다.
2015 회계연도의 미국 연방 재정적자는 5300억 달러(8월말 잠정집계 기준). 벨기에나 대만의 연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고 우리나라 GDP의 40%쯤 되는 규모다. 국가 GDP 순위로는 26위다. 미 연방정부의 누적 순채무도 13조 달러(6월말 집계 기준)로 늘었다.
그런데도 월가가 ‘B’라는 후한 점수를 준 것은 재정적자가 전년 동기에 비해 590억 달러 줄어 4년 연속 감소세를 유지했고 GDP나 연방정부의 예산 규모와 비교할 때 그 비중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09년 재정적자가 1조4000억 달러로 급증하면서 연방정부 부도와 달러화의 몰락까지 걱정했는데 이제는 그럴 염려가 전혀 없어졌다는데 큰 의미를 둔 것이다.
연방정부의 누적 순채무는 GDP의 73% 수준으로 지난 50년간의 평균치보다는 높지만 2차 대전의 여파로 109%로 치솟았던 1940년대에도 버텼던 점을 감안하면 감당할만하다는 것.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을 유지하고 예산 규모도 커지면서 예산에서 부담해야 하는 이자의 비중이 8% 밑으로 떨어진 것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경제가 잘 돌아갔던 1980년대와 90년대보다 이자 부담이 더 낮아지면서 1970년대 초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이다. 빚은 늘고 있는데도 빚 부담은 감소하는 ‘부채의 역설’ 이론이 새로 만들어져야 할 판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가 금리를 올려도 끄덕 없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미 국채의 평균 만기는 69.6개월이라 당장 금리가 오른다 해도 만기국채 재발행에 따른 이자 증가분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미 국채의 누적 평균 수익률은 연 2.2%로 10년 전의 4.4%에 비해 절반 수준이고 최근 발행분의 경우 2.04%에 불과해 금리가 조금 올라도 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원유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시장의 침체로 디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고 있는데다 일본과 유럽은 물론 신흥국들의 재정 악화와 양적완화 조치 등이 겹치면서 세계의 투자자들이 믿고 투자할 수 있는 대상 1순위가 미국 국채라는 것.
그러니 미국은 그간 경기 대응 수단으로 금리인하와 양적완화 같은 통화정책에만 의존해 왔는데, 앞으로는 재정정책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금리를 올리더라도 큰 문제가 없고 경기가 악화하면 재정정책으로 만회하면 된다는 논리다. 가장 큰 빚쟁이가 오히려 여유를 보이는 상황인 셈이다.
그렇다고 금리 인상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연준의 부담이 덜어질까? 우리 정부도 이런 논리로 늘어나는 정부 빚에 느긋하게 대응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남진우 뉴욕 주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