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빚내서 빚을 갚고 있다. 기업들이 4월 한달간 8조8000원에 달하는 시중자금을 빨아들였지만, 3조9000억 원어치를 순상환했다. 순상환은 회사채 상환액이 발행액보다 많다는 뜻이다. 해당 기업들이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는커녕 갖고 있던 돈마저 원리금을 갚느라 투자자에게 돌려줘야 했다는 얘기다.
8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4월 회사채는 3조9000억 원 순상환됐다. 기업들은 1월 7조1000억 원, 2월 5조4000억 원, 3월 2조2000억 원 순발행 기조를 이어왔지만, 4월 들어 마이너스 순발행으로 돌아섰다. 기업들의 현금 여력이 줄어든 탓이다.
유가증권상장사가 올해 발행한 회사채 등 채무증권의 80% 이상은 빚을 갚는데 썼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유가증권 상장사의 채무증권 발행 규모는 24조7110억 원이었다. 이 중 81.3%(20조983억 원)는 채무상환용이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채무상환을 위해 75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난달 이자율 1.507%의 회사채 5500억 원이 만기였고, 이달 9일 이자율 1.985%의 회사채 2000억 원이 만기 된다. SK하이닉스는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위해 차입구조 장기화에 나서고 있다. 1분기 단기차입금 비중은 14.1%에서 11%로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회사채는 9조4900억 원에서 11조4070억 원으로 20% 늘었다. SK하이닉스는 인공지능(AI) 수요 강세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확대 속에 단기차입금 상환 부담을 줄여 재무 융통성을 높이고 있다.
불황의 늪에 빠진 석유화학 업계는 잇따라 회사채 발행에 나서고 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체질 개선이 시급한 석유화학 기업들은 조달한 자금으로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 LG화학은 3월 회사채 1조 원을 발행했다. 이 중 8700억 원은 채무상환용이다. 2월과 3월에 각각 3500억 원, 2400억 원 규모의 상환이 이뤄졌고, 이달에는 2800억 원의 공모사채 상환이 남아 있다. 금호석유화학도 지난달 1000억 원을 발행해 500억 원을 채무상환에 썼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1350억 원을 모집해 750억 원을 채무상환에 사용할 예정이다. OCI도 4월 발행한 회사채 1500억 원을 전액 채무상환에 상용한다.
이밖에 CJ제일제당(6000억 원), KCC(5800억 원), 롯데쇼핑·현대제철(5000억 원), 대한항공(4500억 원), 미래에셋증권(4200억 원), 넷마블·KT·SK텔레콤·우리금융지주·S-Oil·삼성증권·한화에어로스페이스(4000억 원) 등이 올해 발행한 회사채 전액을 채무상환으로 사용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