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인협회와 국내 대표 기업인들이 21일 ‘한국경제 재도약을 위한 주요 기업 사장단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요점은 한마디로 “상법 개정을 멈춰달라”로 간추려진다. 절박한 조난 신호(SOS)나 진배없다.
삼성, SK, 현대차, LG 등 16개 그룹 사장단은 “이사 충실 의무 확대 등이 포함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많은 기업은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에 시달려 이사회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지고 신성장동력 발굴에도 상당한 애로를 겪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업 경쟁력 훼손, 밸류다운 가능성도 우려했다. 기업들의 불안과 위기감이 얼마나 큰지 가감 없이 전해진다.
기업인들이 이례적인 공동성명을 내게 된 계기는 더불어민주당의 상법 개정안 발의다. 민주당은 19일 이사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골자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긴급성명이 나온 것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여파로 대내외 악재가 이어지던 2015년 7월 이후 9년여 만에 처음이다. 기업인들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에 SOS를 보낸 셈이다. SOS 신호는 통상적인 무선통신 체계에서 최우선권을 갖는다. 신호를 수신하면 구조를 위한 최선의 방안을 세우는 것이 철칙이다. 화근을 만든 민주당부터 왜 이런 절박한 신호가 나오게 됐는지 엄중히 들여다봐야 한다.
우선, 이사 충실 의무 대상을 넓히는 것은 불합리하고 모순적이란 점이 있다. 기업 주주는 상법 개정으로 보호하겠다는 개미(소액 투자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 기관, 사모펀드 등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다양한 주체가 있다. 이들을 한꺼번에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이사회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어떤 의사결정도 줄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주요국이 이사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로 제한하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하는 집중투표제를 고집할 이유도 없다. 2인 이상 이사 선임 시 1주당 선임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면 헤지펀드들의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일찍이 부작용을 겪은 미국, 일본은 1950년대 이후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폐지했다. 왜 우리만 역주행해야 하나.
이미 겪은 피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2006년 칼아이칸이 다른 헤지펀드와 연합해 KT&G 이사회에 사외이사 1인을 진출시킨 후 벌인 ‘먹튀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KT&G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쓴 비용은 2조8000억 원에 달한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 도입 확대도 멈춰야 한다. 지분 쪼개기로 SK 의결권을 공격한 후 1조 원의 단기 차익을 거두고 한국에서 철수한 2003년 ‘소버린 사태’가 즉각 재현될 수 있다.
한경협에 따르면 집중투표·감사위원 분리 제도 도입 시 외국기관 연합이 30대 기업 중 8곳의 이사회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10대 기업으로 범위를 좁히면 4곳, 100대 기업으로 넓히면 16곳이다. 해당 기업들의 자산 가치는 수백조 원에 이른다. 왜 국부 유출에 오남용될 길을 뚫지 못해 안달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