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 코인은 달러 등 기존 화폐에 고정 가치로 발행되는 가상자산이다.
테더(USDT), 서클(USDC), 다이(DAI)는 대표적인 담보형 스테이블 코인으로 달러와 발행사가 스테이블 코인 발행량만큼의 담보 자산을 갖고 가상자산을 발행한다.
홍콩 기반의 거래소 비트파이넥스가 발행한 USDT는 과거 담보보다 많은 양의 가상자산을 발행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바 있다.
당시 테더는 여론의 압박에도 꿋꿋이 담보 자산 비율 등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침묵 속에 이를 해소하며 위기를 넘겼다.
스테이블 코인 시장은 이러한 테더의 부실함(?)으로 전체적인 규모가 크게 늘었다. 저스틴 선의 트루유에스디(TUSD), 코인베이스 등과 손을 잡은 서클의 USDC 등이 후속 주자로 참전하며 시장의 파이가 더욱 커졌다.
특히 2021년 하반기 투자 붐을 이끈 탈중앙화금융(디파이) 분야에서 스테이블 코인은 활발하게 쓰이며 시가총액을 크게 늘렸다. 그해 9월 말에는 약 1200억 달러로 1년 전과 비교해 6배 증가한 수치를 자랑했다.
여기에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의 등장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2022년 5월 테라폼랩스의 대표 권도형이 발행한 테라(UST)가 이른바 페깅이 깨지며 99% 폭락하는 루나-테라 사태가 발생하며 시장 전체가 암흑기를 맞이했다.
프랙스 등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 규제에 대한 허들은 높아졌고, 사업 영역 또한 축소되는 위기를 맞이했다.
루나-테라 사태에도 블록체인·가상자산 기업들의 스테이블 코인 사업에 대한 열망을 멈출 수는 없었다.
바이낸스의 바이낸스 유에스디(BUSD)와 퍼스트디지털 달러(FDUSD)를 비롯해 메인넷을 보유한 모든 프로젝트가 탈중앙화 생태계 육성을 위해 꾸준히 스테이블 코인 성장에 집중해왔다. 여기에 페이팔과 리플랩스도 스테이블 코인 사업을 추진하게 되며 앞으로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는 회사와 스테이블 코인의 전체 총량의 규모가 더 커지게 됐다.
16일 코인게코 기준 177개의 스테이블 코인이 발행될 정도로 많은 기업이 시장에 참전했다.
이들 기업이 스테이블 코인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매력 포인트는 역시나 안정적인 유동성 확보다. 미 국채 등 안전 자산을 매수한 뒤 이를 통해 달러 기반의 가상자산을 발행하고, 이를 유통하거나 대출해주는 형태로 자금이 순환된다면 기업으로서는 가만히 앉아서도 큰돈을 벌 수 있다.
당장 테더의 올해 1분기 보고서를 보더라도 뚜렷하게 수치로 나타난다. 테더의 재무제표에 따르면 900억 달러 이상의 국채 자산과 1분기 말 기준 54억 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다.
이로 인해 테더가 얻는 1분기 영업이익은 45억2000만 달러(약 6조1400억 원)다. 또한, 서클은 현재 나스닥에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많은 기업이 스테이블 코인 시장에 눈독 들이는 이유다.
다만 테더급의 영업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경제를 구축해야 하는 탓에, 시장의 지배력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있다. 현재는 USDT, USDC, FDUSD, DAI, 페이팔과 프랙스 정도만 시가총액 100위권 안에 진입했다.
그러나 소수의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현상도 세계 각국의 규제가 시작됨에 따라 지각 변동이 예고됐다. 대표적으로 스테이블 코인 관련 법안이 선제적으로 마련된 유럽에서는 테더 대신 USDC의 발행사 서클이 경쟁자들보다 한발 앞서가게 됐다.
6월 1일(현지시간) 제레미 알레이 서클 최고경영자(CEO)는 서클이 유럽의 가상자산법 미카(MiCA)를 준수하는 최초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됐다고 발표했다.
앞서 서클은 유럽 본사가 위치한 프랑스의 금융시장감독원(ACPR)으로부터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가를 받았다. 미래지향적인 프랑스의 가상자산 규제 기조, 기존 ACPR과의 협력관계 등이 프랑스를 택한 이유다.
업계는 '미카' 기본법 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유럽경제지역(EEA) 소재 법인이며, 디지털 화폐 관련 규제를 승인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생태계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고 있다.
서클은 유럽연합 스테이블코인 발행자 자격증명원인 '전자금융기관'(EMI) 라이선스도 신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테더와 다이의 유럽연합 사업 지속가능성은 다소 불투명한 상태로 전해졌다.
전 세계적으로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 서로 연동되는 상황에서 서클의 이번 성공으로 테더를 앞질렀다는 평가다.
현재 미카의 기본법상 스테이블코인은 '이머니토큰'(EMT)과 '자산준거토큰'(ART)으로 분류된다.
'이머니토큰'은 USDT, USDC과 같은 법정화폐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하며 '전자금융기관' 라이선스를 필요조건으로 삼는다. 탈중앙화 및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은 '자산준거토큰'으로 분리됐다.
여기에 주요 스테이블코인은 △보유자 수 1000만 명 이상 △시가총액 50억 유로(약 7조4110억 원) 이상 △일 평균 거래 건수 250만 건 이상 △일 거래대금 규모 5억 유로(약 7411억 원) 이상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규제가 본격화된 계기는 '음지화'다. 가상자산이 그간 범죄자들의 자금 세탁 도구로 악용되거나, 불법적으로 편취한 사례들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철저한 통제하에 두겠다는 각국의 방침이 있었다. 여기에 테러 자금으로 활용되며 미국 재무부의 압박이 거세졌다.
미국 재무부는 올해 4월 "국제테러단체 알카에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같은 조직뿐만 아니라 북한, 러시아 같은 국가들이 재원을 옮기면서 정체를 숨기는 새로운 수단을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는 금융제재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테이블 코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5월 "러시아 대형 제조업체 2곳이 중국 기업과 거래하기 위해 USDT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해당 매체는 "현재 니켈, 강철 등 원자재를 다루는 러시아 기업들이 중국 기업들로부터 대금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특히 러시아 기업들의 계좌가 속속 동결되는 예도 있었기 때문에, 가상자산으로 대금 결제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부작용도 있었지만 스테이블 코인 시장의 성장은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스테이블 코인을 회사채로 비유하자면 CBDC는 국채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19년 도입 검토 뒤 조사·평가 단계를 거쳐 현재 준비·구현 단계에 진입했다. ECB는 이르면 2025년 말을 목표로 CBDC 최종 도입을 추진 중이다.
중국의 경우 2014년부터 디지털 화폐 및 전자결제 개발에 착수했다. 중국 정부는 경품 이벤트 등을 통해 디지털 위안화(e-CNY) 사용을 유도하고 공공요금과 세금 납부, 정부 직원 급여 지급 등에 e-CNY를 활용하고 있다.
일본은 일본은행(BOJ)이 2021년 CBDC 실증실험을 시작으로 기술 개발에 나섰다. 올해 법적 논의를 마치고 2026년 전국적 논의를 거칠 예정이다.
CBDC는 여러 개의 서버에 거래 정보를 분산 저장하기 때문에 거래 조작이 불가능하고, 금융거래 수수료가 발생하지 않는다. 비트코인 등 민간 암호화 자산과 비교해 가치 변동성이 낮고, 자금세탁 등 불법 거래에 악용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다만 미국의 미온적 입장 등에 따라 CBDC의 세계적 전면 도입은 지연될 소지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은 2016년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연구를 시작으로 CBDC 도입을 준비하고 있으나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안 이슈로 인한 도입 반대 의견 등이 잇따랐다. 이에 연방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가 5월 공화당 의원들 주도로 CBDC 도입 금지 법안을 승인하며 진행 상황이 정체됐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과거 CBDC를 자유에 대한 위험이라며 재선 시 도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헨리 아슬라니안 홍콩대학교 교수는 "미국의 행보에 따라 CBDC 냉전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며, "중국은 CBDC에 관해 다른 나머지 국가들보다 5년에서 6년 이상 앞서있으나, 미국과 유럽엔 CBDC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전면적으로 금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