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가상자산 산업의 공동의 적으로 자리 잡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하원에서 발의한 '가상자산 커스터디 의무에 대한 회계 지침'(SAB 121) 폐지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밝힌 가운데 16일 미 상원이 해당 지침을 폐지하는 법안을 가결하며 정면 승부를 예고했다.
SAB 121은 상장사들이 타인으로부터 수탁받은 가상자산을 대차대조표상 부채 및 보유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따라서 고객의 가상자산을 보관하는 회사는 대차 대조표에 가상자산을 기록해야 한다. 미 금융당국은 그중 은행들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자기자본비율을 요구하고 이를 유지해야 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규제할 방침이다.
자기자본비율은 인식하는 보유 자산 규모와 반비례하며 수탁 자산이 늘어날수록 감소한다. 이러한 특성상 해당 지침을 수용할 경우 금융당국이 요구하는 자기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사실상 은행이 고객을 대신해 가상자산을 수탁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업계에서는 라이언 셀키스 메사리 대표가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는 대규모 재산 몰수 및 가상자산 압류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뿐 아니라 공화당 측에서도 “보관한 자산에 대해 준비금을 마련하는 건 은행을 시장해서 배제하려는 악법”이라고 주장하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심지어 상원에서 다수당인 민주당에서도 대거 반란표가 나오며 해당 법안은 상원에서 60대38로 통과됐다.
이 같은 반발에도 바이든 대통령의 가상자산 때리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올해 3월 12일 내년 예산안에서 가상자산 채굴세 부과안을 발의해 내년 1월 1일부터 이 법안을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첫해에 10%, 다음 해에 20%, 3년 차부터 30%를 단계적으로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앞서 지난해에는 바이든의 가상자산 투자자 세금감면 반대 발언에 시장이 휘청이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5월 21일 G7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 “부유한 절세자 및 가상자산 거래자는 부당한 수혜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애초 바이든 정부는 가상자산 산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출범 당시만 해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에 가상자산에 친화적인 인사로 분류된 개리 겐슬러를 지명했다. 개리 겐슬러 당시 지명자는 2018년부터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블록체인 강의를 진행했고 오바마 행정부 당시 상품선물거래위원장(CFTC)을 역임한 증권가 규제에 앞장섰던 인물로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 친화적인 인사로 분류된 바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가상자산 산업을 법제화하며 육성시킬 의지를 드러내는 등 친화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에는 그를 후원한 이들의 지지에 부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 대선에서 가상자산 산업에 대한 강한 규제를 예고한 트럼프와 달리 온화한 입장의 바이든에 많은 후원금이 몰렸고, 당시 바이든 후보 또한 이와 같은 목소리를 내며 지지를 받은 것이다. 샘 뱅크먼 프리드 전 FTX 대표는 바이든의 선거운동 당시 개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인 520만 달러(약 59억 원)를 후원했다. 이런 지지에 부합하듯 바이든 행정부는 22년 3월에 가상자산 규제 행정명령을 공표, 재무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들에 디지털 달러 연구 착수를 지시하며 시장 양성화를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2022년 11월 FTX가 고객 자산 유용 등 심각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로 따라 파산했고, 이에 따라 가상자산 친화 은행 실버게이트가 파산하는 데에 이르자 정치권이 나서 손을 봐야겠다는 목소리가 모아졌다. 결국, 집권 1년 만에 바이든 정부는 가상자산 산업에 철퇴를 가하기로 나선 것이다.
바이든의 변심에 적극적으로 나선 건 SEC였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바이든의 칼'이 돼 가상자산 사업자들에게 비수를 꽂고 있다. 비트코인 현물상장지수펀드(ETF) 승인에도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던 겐슬러 위원장은 이더리움 현물 ETF 승인에 대해 우회적으로 답변을 회피하며 연기하고 있다. 여기에 리플, 유니스왑, 코인베이스, 컨센시스 등 글로벌 가상자산 연이어 때리기에 나섰다. 최근에는 주식 및 가상자산 거래 플랫폼 로빈후드에도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기업에 사전에 해명을 요구하는 통지서인 '웰스 노티스'를 발급해 제재 오남용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치닫자 달러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되려 가상자산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 대선을 앞두고 달러와 가상자산의 공존 가능성을 얘기하며 가상자산 업계 포섭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8일 지지자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가상자산을 향한 미국의 적대감을 멈추고 이를 수용하겠다. 나아가 캠페인 기부금을 가상자산으로 받을 방안을 모색 중"이라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가상자산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가상자산에 우호적이라면 나를 뽑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같은 소식이 연이어 보도되자 미국에서 가상자산을 보유한 유권자 중 절반이 선거에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더블록에 따르면 미국 여론조사 기관 패러다임의 온라인 조사 결과를 인용해 이같이 전했다. 여론조사 결과 미국 내 가상자산 보유자 중 48%는 트럼프에게, 39%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답했다. 13%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패러다임은 "가상자산 보유자 중 43%가 2020년 대선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투표했다”고 했다. 이어 "가상자산을 가진 유권자 중 일부가 트럼프 후보로 마음이 돌아선 것”이라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가상자산 관련 조치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바이든 정부의 골머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유수 기업을 배출하며 가상자산의 중심으로 불리던 미국에서 사실상 가상자산 산업 육성이 지지부진하자, 새로운 가상자산 허브들이 부상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꾸준히 증권법과 지급결제법을 손보는 일본, 싱가포르 외에도 홍콩이 현물 ETF를 승인하며 적극적으로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는 데다 영국에서도 긍정적인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영국은 가상자산을 기존의 금융서비스법(FSMA)의 규제범위에 포함해 금융감독청(FCA)의 인가를 받은 금융회사들이 가상자산을 매매, 중개, 투자자문, 자산운용 등 영업의 대상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한, 영국 FCA는 올해 3월 12일 기관투자자에 한해 가상자산 기반 현물 상장지수증권(ETN) 승인 신청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개인의 관련 ETN 참여는 금지했지만, 기관투자자에겐 가상자산 투자의 길을 열어둔 것이다. 같은 날 런던 증권거래소도 2분기부터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의 ETN 상장 신청을 받는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정치권에서도 당론을 가리지 않고 가상자산 산업 육성을 천명했다. 코인데스크는 다가오는 영국 총선이 가상자산 산업 규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16일 보도했다. 해당 매체는 "2010년부터 보수당 집권 하에 영국은 가상자산 규제를 위한 조치를 차근차근 마련해왔으며, 2022년에는 영국을 가상자산 허브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미 FCA 참여로 시장 규제 법안을 도입하기도 했다"며 "정부는 7월까지 가상자산 거래소, 커스터디, 스테이킹, 스테이블코인 등을 포함한 규제 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총선에서 집권당이 노동당으로 바뀔 수 있지만, 영국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규제 진전을 방해하진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로라 나바라트남 영국 가상자산 혁신위원회 정책 책임자는 "물론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둔화를 일으킬 수 있으나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과 FCA 등 규제기관도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위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