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 폐기
내막 들여다보면 불합리할 수도
‘집단적 동의권 남용’ 판단 남아
그런데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는 변경된 취업규칙에 사회통념상의 합리성이 있다면 집단적 동의 없이도 유효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서, 기계적인 법리 적용으로는 도저히 구체적인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폐지하는 대신, 노동조합 등이 ‘집단적 동의권을 남용’하는 경우 예외적으로 동의 없이 취업규칙이 유효로 인정될 수 있다는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다.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문제될 만한 전형적인 사례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은 2004년 주(週) 5일제 도입과 함께 시작됐다. 2004년 시행된 개정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을 주 44시간에서 주 40시간으로 축소해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월차휴가를 폐지하고 그 전에는 제한이 없던 연차휴가일수를 최대 25일로 제한했다.
개정법률 부칙은 근로자, 사용자, 노동조합은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에 법률 개정사항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반영해야 한다는 내용을 규정했다. 나아가 고용노동부는 개정 법률을 반영해 취업규칙을 개정하는 것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므로 유효하다고도 안내했다.
이 사건 피고 회사는 2004년께 과장급 이상의 간부사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간부사원 취업규칙’을 만들면서 개정된 근로기준법 내용을 간부사원 취업규칙에 반영했다. 고용노동부는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가 없어도 유효하다는 입장이었으나, 회사는 최대한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근로자들의 동의를 구했다. 당시 대법원 판례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시 전체 근로자 집단이 아니라 해당 규정을 직접 적용받는 근로자집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회사는 변경되는 취업규칙을 직접 적용받는 집단, 즉 간부사원들의 동의를 물어 약 89%의 동의를 받았다.
문제는 수년 후인 2009년께 대법원이 새로운 판례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제 대법원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시 해당 취업규칙을 당장 적용 받는 근로자집단뿐 아니라 장차 그 집단에 들어올 수 있는 근로자들의 동의까지 받아야 한다는 새로운 입장을 제시했다.
그리고 다시 수년 뒤인 2014년 일부 근로자들이 이 사건 소송을 제기했고 2017년 선고된 2심 판결은 앞선 2009년 판례를 적용해서 간부사원들뿐만 아니라 장래 간부사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던 일반직‧연구직‧생산직 비(非)간부 사원 등 모든 근로자 집단의 동의를 받았어야 한다고 보아, 이러한 동의 없이 제정된 간부사원 취업규칙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결국 회사는 법률의 내용을 반영하고 당시의 판례에 따라 가능한 엄격한 절차를 거쳤으며 감소한 연월차휴가수당 상당액을 기본급에 반영하는 등 상당한 보상조치를 제시해 가며 간부사원 89%의 동의를 얻었지만, 십 수 년이 지나 모든 것이 무효라는 판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상고하면서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주장했으나 대법원은 법리 자체를 폐기해 버렸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로써 근로자들이 승리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사건은 원래 2심에서 근로자들이 이겼던 사안인데 회사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주장하며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는 폐기하면서도 노동조합 등의 ‘집단적 동의권 남용’이 있었는지 여부를 고등법원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직 집단적 동의권 남용 법리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앞으로 이 사건에 이 법리를 적용할 때 어떠한 결론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사건의 경우 취업규칙 변경 과정에서 국회, 법원, 고용노동부가 피고 노사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정을 외면하고 형식적인 노동조합의 ‘동의권’에만 치중한다면 사건의 구체적이고 타당한 해결이 외면될 위험이 있다. 대법원이 새롭게 제시한 법리가 정의와 구체적 타당성의 요청에 부합하도록 구체적으로 다듬어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