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당 떨어졌어”
오후가 되면 쏟아지는 피로에 너도나도 외치는 말인데요. 요즘 이 당을 줄이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요즘 늘어나고 있습니다. 식후 달달한 커피나 주스, 탄산음료 등의 유혹을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죠
이들이 이처럼 그 좋은(?) 당을 포기하는 이유는 바로 건강 때문입니다. 비만과 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온 설탕에 대한 소비자들의 경각심이 증가한 데 따른 건데요. 이에 일각에서는 설탕을 담배와 같은 위험 식품으로 보고 ‘세금’을 부여하자는 목소리까지 내고 있습니다.
이에 최근 식음료업계는 설탕 줄이기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요가 줄어들면 가격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수요 공급 법칙에 따른 것이죠. 그런데 최근 설탕값이 급등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일까요.
최근 트렌드를 반영하듯 식음료업계에서는 음료수뿐 아니라 주류, 과자, 아이스크림 등 무설탕 제품을 앞다퉈 선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설탕을 빼 칼로리를 대폭 줄인 ‘제로 음료’가 그 선두주자인데요.
롯데칠성음료는 올해 탄산음료 ‘밀키스’ 신제품으로 ‘밀키스 제로’를 내놨고요. 2월에는 콜라 ‘펩시 제로 슈거 망고향’을 선보이기도 했죠. 한국코카콜라는 환타 제로 포도향에 이어 최근 환타 제로 파인애플향 판매를 시작했고, 다음 달에는 신제품 ‘코카롤라제로 레몬’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먹고 싶은 음료를 먹으면서 건강관리를 하자는 의도죠.
심지어 소주도 ‘무설탕’ 제품이 인기입니다. 롯데칠성음료가 지난해 9월 출시한 ‘처음처럼 새로’는 무설탕 소주의 대표주자로,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판매량 1억 병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마시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아이스크림과 과자제품도 ‘무설탕’ 제품이 대세입니다.
이처럼 무설탕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늘면서 설탕 수요가 감소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는데요. 하지만 결과는 달랐죠. 설탕 수요는 여전히 견고한데요. 우리가 섭취하는 가공식품을 통해 섭취하는 설탕의 양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하루 설탕 섭취 권고량은 50g 이하인데요. 예를 들어 케첩 1큰술에는 4g, 탄산음료 한 캔에는 40g의 당이 들어있고요. 병에 든 형태로 판매되는 샐러드드레싱에도 생각보다 많은 설탕이 함유돼 있습니다. 드레싱 2큰술이면 5~7g의 설탕을 섭취하게 되는 셈이죠. 간단한 아침 식사로 애용하는 시리얼도 마찬가지인데요. 시리얼 한 컵당 10g에서 많으면 20g의 설탕이 들어있죠. 이렇게 단 걸 먹는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한 채 알지도 못하는 사이 당분을 섭취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이같이 설탕 수요는 견고한 가운데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최근 설탕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는데요. 19일(이하 현지시간) CNBC에 따르면 최근 원당(설탕 원료) 선물 가격은 파운드당 24센트까지 올라 11년 만의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설탕 가격이 오르는 건 코로나19 팬데믹 후 수요가 회복되는 상황에서 공급이 줄고 있기 때문이죠.
거기다 세계 2위 설탕 생산국인 인도의 경우 이달 앞서 기상 악화를 이유로 2023년 9월까지 1년 동안 설탕 생산량 추정치를 종전 대비 3% 하향 조정했고요. 바이오연료 제조에 설탕 원료인 사탕수수를 쓰면서 해외에 수출하는 설탕도 대폭 줄였습니다.
유럽에선 극심한 가뭄 등으로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무 재배 토지 면적이 줄고 수확이 줄었고, 심지어 세계 최대 설탕 생산국인 브라질의 경우 폭우로 인해 4월 수확이 늦어지고 있죠.
브라질 생산의 90%를 차지하는 중남부 지역의 사탕수수 수확은 4~12월 이뤄지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22일 영국 런던 국제금융선물거래소에서 거래하는 백설탕 선물 가격은 t당 676.3달러로 마감했는데요. 12일 t당 702달러를 기록하는 등 연일 최고치를 찍고 있죠. 설탕 가격이 700달러를 넘어선 건 2011년 11월 이후 12년 만입니다. 넉 달 새 30% 이상 폭등했죠.
7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올해 3월 설탕 가격지수(2014~2016년 평균 가격=100)는 127로 2016년 10월 이후 최고치입니다. 지난달 곡물과 유제품 등 가격이 모두 하락했는데, 설탕 가격만 2개월째 오름세죠.
설탕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슈거플레이션(슈거+인플레이션)’ 우려도 나오는데요. 블룸버그는 “미국·유럽의 식료품 가게에선 이미 설탕값 상승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라며 “설탕 가격이 당분간 식품 물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죠.
앞서 설명했듯 설탕은 밀가루 등 곡물과 함께 식품의 주요 원재료이기 때문인데요. 특히 빵·과자·아이스크림·음료 같은 가공식품 물가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한 제과업체 관계자는 “(설탕이 들어간) 가공식품의 원재료비에서 설탕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안팎”이라며 “원부자재는 물론 가공비·인건비·물류비 상승에다 설탕값 폭등까지 겹쳐 부담이 크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부는 물가 다잡기에 나섰는데요. 장보현 기획재정부 물가정책과장은 “설탕의 주 용도가 식품첨가제인 만큼 다른 주요 농산물 가격 상승 부담보다 식품 물가 상승에 미치는 영향은 덜하다”라면서도 “정부가 연초부터 가격 인상 자체를 요청해 일단 물가 상승을 억눌렀지만, 가공식품 물가가 언제 튈지 몰라 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식품업계는 정부의 가격 인상 자제 요청에 동조하는 분위기지만 모든 비용을 내부적으로 감내하면서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는 등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데요. 하지만 설탕이 많이 사용되는 빵·과자·아이스크림 등의 가공식품의 경우 당장에라도 가격 변동에 영향이 갈 수도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실제로 가공식품 물가가 심상치 않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 물가는 1년 전보다 4.2% 올랐지만, 가공식품은 9.1% 상승했는데요. 빵(10.8%)·과자(11.2%)가 두 자릿수가 올랐고, 초콜릿·콜라와 아이스크림 등 가격이 일제히 100~200원 오른 상태죠. 설탕이 주원료인 식용유(28.1%), 마요네즈(27.8%), 밀가루(24.1%), 케첩(19.8%) 또한 가격이 많이 뛰었습니다.
‘제로 슈가’, ‘노 설탕’ 열풍 가운데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세의 설탕. 심상치 않은 설탕값에 평소 먹거리가 위협받는 이 상황 속 단순한 ‘가격 자제’로만 버티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