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은 오랫동안 ‘청년문학’의 외관을 띠고 전개되어왔다. 근대 초기에 육당 최남선이 만든 잡지가 ‘소년(少年)’과 ‘청춘(靑春)’이었을 때, 이미 한국문학은 ‘순정(純情)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청춘’을 바치는 이야기로 시종할 운명을 가지고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를 이은 ‘창조(創造)’나 ‘폐허(廢墟)’, ‘백조(白潮)’ 역시 스무 살 안팎 젊은이들이 만든 연합체였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표작도 젊은 시절에 씌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광수가 불세출의 소설 ‘무정(無情)’을 연재했을 때 나이는 우리 셈법으로 스물여섯이었다. 참 젊은 나이였다. 하기야 그는 10대 때부터 소설을 썼던 조숙한 천재이긴 했다. 그 뒤를 이은 시인이나 작가들도 비교적 젊었을 때 중요한 성과를 냈다. 김소월이 기념비적 시집 ‘진달래꽃’을 냈을 때 스물넷이었고, 백석 시집 ‘사슴’도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출간되었다. 오장환 시집 ‘성벽(城壁)’은 20대 초반에 나온 것이었다.
해방 후에도 우리는 최인훈의 ‘광장(廣場)’이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씌어졌고,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이 스물넷에 발표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결국 한국문학의 수많은 대표작들이 작가들의 20대에 씌어졌고, 그들의 수명이 짧아서였는지 아니면 젊을 때 역량이 소진해버렸는지 한국문학은 그 후 진정한 의미의 ‘노대가(老大家)’를 가질 기회가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문학의 ‘청년문학’으로서의 면모를 강화하고 부추긴 것은 단연 작가들의 요절이었다. 천재는 요절한다더니 한국문학의 구성원들이 꼭 그 꼴이었다. 나도향, 이상, 김유정, 윤동주, 기형도 등은 서른을 못 채우고 돌아갔고, 김소월, 박용철, 이효석, 오장환, 김환태, 박인환, 신동엽 등도 한창 때인 30대에 숨을 거두었다. 비교적 완결성 있는 문학 생애를 남긴 김동인, 현진건, 정지용, 김영랑, 채만식, 임화, 김남천, 이육사, 김기림, 조지훈, 김수영, 김현, 고정희 등도 지천명에 이르지 못했다.
젊어서 절편들을 남기고 중년 이후 진경을 못 보인 이들도 많았는데 이상화, 김광균, 손창섭, 장용학, 김승옥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또 북쪽으로 올라가 존재론적 연속성으로서의 문학적 말년을 가지지 못했던 이태준, 박태원, 백석, 이용악 등도 있다. 어쨌든 한국문학은 중년 혹은 장년 이후의 문학적 전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근대의 한복판을 지나왔으며, 자연스럽게 우리는 ‘젊음’이야말로 더없는 문학적 수원(水源)임을 흔쾌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노대가의 문학
이와는 달리 우리에게 ‘노대가’의 모습을 보여준 이들도 여럿 있다. 식민지 시대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해방 후에 문학적 말년을 보여준 박종화, 오상순, 염상섭, 이병기, 김동리, 서정주, 김정한, 김달진, 신석정, 박두진, 황순원, 김현승, 김광섭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근대사의 험난한 협곡을 지나오면서 요절의 불행을 벗어나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간 행운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 구상, 박경리, 김규동, 김춘수, 홍윤숙, 성찬경, 박희진, 박완서, 이청준, 홍성원, 오규원, 최하림, 최인호, 이가림, 김종철 선생의 문학적 말년을 외경의 마음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러한 노대가들의 연쇄적 점증(漸增)은 한국문학이 부피를 키워가면서 나타난 보편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나이 60에 겨우/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신(神)이 지으신 오묘한/그것을 그것으로/볼 수 있는/흐리지 않는 눈/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채색하지 않고/있는 그대로의 꽃/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
세상은/너무나 아름답고/충만하고 풍부하다./신이 지으신/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지복(至福)한 눈/이제 내가/무엇을 노래하랴./신의 옆자리로 살며시/다가가/아름답습니다./감탄할 뿐/신이 빚은 술잔에/축배의 술을 따를 뿐.
--박목월, ‘개안(開眼)’ 전문
박목월의 ‘크고 부드러운 손’(민예원, 2000년)이라는 유고시집에 실린 이 작품은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실로암 못가의 기적 체험을 인유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 그 영안(靈眼)의 중요성을 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허튼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적 자아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이자 근시안적 정열의 무익함에 대한 노년의 성찰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영혼의 장님이여/안다는 그것으로/눈이 멀고/보인다는 그것으로/보지 못하는/오만과 아집 속에서/진흙을 이겨/눈에 바르게 하라”(‘믿음의 흙’)는 단호한 진술과 함께 신의 섭리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목월 말년의 시편은 깊은 신앙과 인생론적 긍정 속에서 갈무리된다. 초기 시집 ‘청록집(靑鹿集)’의 보편적이고 상상적인 자연을 지나, 생활의 구체성을 노래한 중기 시편을 지나, 신앙으로 귀의하면서 잔잔한 서정으로 귀착한 그의 말년이 지극히 평화롭게 밀려오는 순간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생존 문인인 정완영, 김종길, 김남조, 최일남, 정명환, 고은, 이어령, 유종호, 신경림, 김우창, 김윤식, 마종기, 황동규, 정현종 선생의 문학적 궤적을 지금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다. 바야흐로 근자에 이르러 우리는 한국문학 심층으로서의 ‘노경의 문학’을 폭넓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 작가들의 평균 수명 연장과 함께 찾아온 현상이기도 하지만, 시인 작가들의 개별적 역량과 지속성에서 우러나오는 소망스런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김남조의 ‘귀중한 오늘’(시학· 2007년)에는 ‘노약자’라는 아름다운 시편이 실려 있는데, 비록 화려한 시편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는 시인이 추구해 마지않는 ‘삶의 여백’ 같은 것이 진하게 묻어난다.
노약자, 이 이름도 나쁘진 않아/그간에 삼만 번 가까이는/해돋이를 보고 해 아래 살아/해의 덕성과 은공을 웬만큼은 일깨웠는지라
사람의 마음도/삼만 번의 열 갑절은/밝거나 흐린 음표들의 악보로써/나의 심연으로 흘러 닿아/사람의 노래를 아는 실력의 웬만큼은 되었는지라
노약자,/무저항의 겸손한 이름이여/으스름 해 저물녘의/초생달빛이여/치수 헐렁하여 편한/오늘의 내 의복이네
--김남조, ‘노약자’ 전문
김남조 시학의 외연은 사랑과 구원의 테마에 온전히 바쳐졌다. 그의 첫 시집 ‘목숨’(1953년) 이후 그러한 사랑과 구원의 목소리는 원숙한 톤과 색채를 얻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시인이 얻은 것이 바로 노경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지혜일 것이다. 시인은 ‘노약자’라는 이름이 전혀 나쁘지 않고, 오히려 “해의 덕성과 은공”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순리임을 고백한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도 “밝거나 흐린 음표들의 악보”로 흘러들어 시인의 심연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무저항의 겸손한 이름”으로서의 노약자는 그래서 ‘청년문학’을 지나 ‘노경의 문학’으로 진화해가는 한국문학의 남다른 부피를 풍부하게 말해준다. 그러니 그때가 비록 “으스름 해 저물녘”일지라도 그것은 “편한/오늘의 내 의복”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익장의 문학을 위하여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한국문학에도 이른바 ‘노경의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적 성과가 만만치 않은 깊이와 너비를 가지고 있음을 증언해준다. 그만큼 ‘노경의 문학’은 이제 그 축적량이 만만치 않게 되었다. 우리가 항용 쓰는 말 중에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이들의 문학적 성취는 한국문학의 심층으로서의 노경의 문학을 노익장으로 전면화하고 있다. 한 후배로서, 참으로 경의에 값을 하는 현상이자 성취라고 고백해본다.